입학안내
입학상담Q&A

Wedding Prep 03. 포항 본식영상 본식DVD 계약 후기 더누벨 x 본유니크 필름새 창 열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안현슬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6-07-14 21:50

본문

세계의 첫 무대를 향하여​2. 알바트로스, 먼 바다를 향해 날다 ​게이트 1. 벨기에, 세계를 향한 첫걸음을 떼다​○ 1983년 11월 19일(토) : 여권을 갖는다는​1970년 3월 어느 날 밤, 서울 마포구 합정동 부근 강변로에 멈춰 있던 검정색 코로나 승용차에서 권총에 넓적다리를 관통한 남자와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숨진 여인이 발견되었다. 제3공화국의 대표적인 의문사로 기록된 ‘정인숙 살해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정작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숨진 여인의 핸드백에서 나온 여권이었다. 지금은 주민등록증처럼 많은 사람들이 여권을 소지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권은 매우 드문 것이었다. 외교관이 아니면 비록 장관이라 할지라도 소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여권이었던 것이다.그런데 1983년, 드디어 나도 그 대단한 여권을 갖게 되었다. 토목 분야의 선진기술을 배우기 위해 벨기에로 해외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내가 해외에 나가다니… 이게 정말 꿈이 아닌가?’ 어릴 적부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 보는 게 꿈이었다.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열여섯 살이 되자 친구들과 전국을 돌며 무전여행을 했고, 성장한 뒤에는 전국을 누비면서 명승고적을 찾아 다녔다. 그곳에서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를 점검해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나에게는 모든 여행이 그 자체로 모험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싱겁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일들마저 나의 경계를 넓혀주는 즐거운 과정이었던 것이다. 넓게 보면 인생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세계무대로 뻗어나갈 기회가 찾아오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미 해외에 나가기 위해 방공소양교육을 받아놓았으며, 출장 갈 날만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유럽으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아침이 되어 먼 길 떠나는 사위를 배웅하기 위해 장모님이 오시고 친척들도 모였다. 우리는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일단 회사로 출근했다. 간단한 업무를 처리한 뒤 11시 경 김포 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으로 들어가자 군데군데 배웅 나온 사람들이 모여 있을 뿐, 정작 떠날 사람은 몇 사람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를 찾아가 티케팅을 하고 파리공항에서 짐을 찾게끔 부쳤다. 절차 하나하나가 낯설고 신기했다. 가족들의 손을 잡자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다들 눈물을 흘렸다. 설렘과 아쉬움 속에 작별인사까지 나누고 나자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 했던 복병이 나를 막아섰다. 병역의무 신고서를 서랍에 두고 온 것이다. 탑승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45분! 정신이 아찔했다. 나는 그 길로 곧장 출입문을 박차고 공항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기사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지금 파리를 가야 하는데 병역의무신고서를 두고 왔습니다. 회사로 갔다가 한 시까지 와 주시겠습니까?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부탁드립니다.”“예?”운전사는 시계를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이내 나의 다급함을 이해하시곤 단호하게 명령조로 말씀하셨다.“한 번 가봅시다. 뒷좌석에 무조건 누워 있어요. 절대 일어나지 마세요!”나는 시키는 대로 뒷좌석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자 운전사는 비상 깜박이를 켜더니 그야말로 폭풍의 질주를 시작했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교통순경의 제지도 무시한 채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김포가도를 달려갔다. 숨이 턱 막히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회사에 도착해 부리나케 서류를 챙겨 다시 폭풍의 질주를 하며 공항에 도착했다. 운전사에게는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할 시간이 없었다. 워낙에 다급한 상황이라 감사의 표시로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쥐어주곤 탑승구로 뛰어 갔다.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공항직원의 안내를 받아 탑승구로 뛰어갔다. 이마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졌다. 기내에 들어서자 말레이시아인 스튜어디스가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나는 찬 물수건을 부탁해 땀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바라본 공항 옥상에서는 그때까지도 가족들이 돌아가지 않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후 1시 5분. 자리에 앉자마자 기체가 서서히 움직였다. 삼십 년 넘게 내가 살았던 땅을 박차고 오르는 기분이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느낌이었다. 나는 펜을 꺼내들었다. 그 순간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여행일기를 메모하고 기록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남미에서 아프리카까지 세계 100여 개국을 다니며 쓴 기록들은 훗날 내게 있어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지금도 가끔씩 그 기록들을 들춰보며 시간여행을 떠나곤 한다. 기내를 둘러보니 10여 명이 앉아 있을 뿐 좌석은 텅텅 비어 있었다.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을 때였고, 항공사로서도 10여 명 안팎의 탑승자들을 싣고 서울에서 유럽까지 가면 채산성이 떨어지다 보니 각 나라를 돌면서 여행자들을 이삭 줍듯 모아서 운행을 했다. 덕분에 한국에서 유럽을 가려면 26시간이 소요되었으며, 기내식만 여섯 번을 먹어야 했다. 게다가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는 격주로 목요일에만 단 한차례 운행되었다. 각 노선이 다양해서 언제든지 편하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모든 면에서 열악한 시절이었다. 나는 감사기도를 드렸다. 내가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한꺼번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렇게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 바깥을 내려다보니 바둑판 모양으로 잘 정리된 이색적인 농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타이베이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다음 탑승까지는 두 시간의 여유가 있어 면세점이라는 곳에 들어가 보았다. 난생 처음 보는 이국의 면세점은 그저 황홀하기만 했다.그곳에서 비행기는 몇 사람을 더 탑승시키고 다시 코타키나발루를 향해 출발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숲을 지나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한 것은 깜깜한 밤중이었다. 착륙하고 나서 비행기의 문을 열자마자 열대 특유의 열기가 밀려들었다. 비행기는 이곳에서 2시간 동안 정착한다고 했다. 나는 잠깐 면세점이라도 가볼까 생각했지만 그러다 길을 잃고 헤매기라도 한다면 그 사이에 비행기가 출발해 버릴 것 같아서 그냥 기내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멀리 보이는 면세점에서 신기한 물건들이 나를 유혹했지만 눈요기로 만족했다. 이윽고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말레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를 향해 날아갔다. 막상 도착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섰다. 영어회화가 능숙한 것도 아니고, 주위에도 해외에 나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던 터라서 경험담조차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저 해외로 나간다는 들뜬 기분에 무작정 비행기를 탄 나로서는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초초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캄캄한 밤하늘을 4시간 쯤 날아갔을까? 서울은 한밤중, 모두들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아이들과 아내에게 보낼 엽서를 차례로 썼다. 그때만 해도 기내에서 엽서를 써서 승무원에게 주면 다음 기착지에서 서울로 부쳐주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소식을 전할 수가 있었다. 벨기에에 도착할 무렵이면 엽서도 집에 도착할 것이다.다시 2시간이 지나 자정이 가까워 올 무렵,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더운 공기가 물씬 풍겼다. 그곳에서 점보 비행기로 탑승했을 때는 서울을 떠난 지 꼭 16시간 만이었다. 그 사이, 서울에서 함께 출발했던 황색인간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피부색이 하얗고 까만 외국인 몇이 보일 뿐이었다. 이제는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내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자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내 먼 별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 되었다.​○ 11월 20일(일) : 26시간을 날아 벨기에에 입성하다​갖은 상념에 시달리다가 깜빡 잠이 든 나는 비행기가 아랍에미리트 상공을 날고 있을 때에야 눈을 떴다.당시 중동지역에는 해외건설산업 붐이 일고 있을 때라서 우리나라의 산업역군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한 고향에 사셨던 길남이 형님도 한 토목회사의 기술자로 중동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곳 어딘가에 형님이 있으리란 생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거대한 샹들리에처럼 화려한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공항에 도착하니 규모는 김포공항처럼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이야 김포공항도 시설이 좋지만 그때는 달랑 공항 건물 한 채가 전부였다. 두바이의 아부다비 공항. 나는 산유국의 공항 규모가 그 정도라는 것에 대해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잠시 여유시간을 이용해 자리에서 일어나 트랩을 내려갔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와 보니 얼마나 덥던지 그 열기가 40℃는 넘는 것 같았다. ‘아니 도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가 있지?’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얀 옷을 입고 있고, 한 구석에서는 기도시간이 되었는지 몇몇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알라신에게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또 한쪽에서는 어디를 가려는 건지 노숙을 하는 건지 아랍인 한 무리가 바닥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행색이 남루해 보였다. 아랍에미리트는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6천 달러로 높은 편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중동의 대부분 나라가 그렇듯 넉넉하지가 못 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한창 발전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도 더욱 가난하게 보였다. 아랍에미리트는 생소할 뿐만 아니라 ‘중동에 있는 나라는 더럽고 가난하다’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아부다비 공항은 그런 인식을 여지없이 확인시켜 주었으며, 날씨까지 후덥지근해서 첫인상이 좋지만은 않았다.나는 잠깐 사이 옷이 흠뻑 젖어서 기내로 돌아왔다. 비행기는 그곳의 더운 열기와 탑승객을 싣고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을 향해 갔다. 나는 사진으로만 보던 튤립과 풍차의 나라에 왔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특히 튤립은 땅이 낮아서 하나님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네덜란드를 잘 사는 나라로 바꾸어준 귀한 선물이다. 지금은 직접 튤립농사를 짓지 않고 로열티만으로도 네덜란드의 국부를 이루고 있지만, 당시 암스테르담 근교의 농장들은 거의 튤립농사를 지었고 봄이 오면 들판 가득 튤립이 피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계를 보니 지금까지 비행한 시간만 22시간이었다. 이제부터 비행기를 갈아타고 혼자서 최종 목적지까지 가야 했다. 초행길인 나로서는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하면서 그곳까지 갈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괜히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다가 비행기를 못 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로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있는 걸까?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당시 내가 배운 영어는 그야말로 엉터리 영어였다. 나를 가르친 영어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정통영어도 배우지 못한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어설프게 영어를 배운 분이었다. 그런 분에게 영어를 배우다 보니 우리는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일본식 영어밖에 배울 수가 없었다. ‘볼트(bolt)’도 ‘보드’라고 발음했고, ‘올라잇(allright)’도 ‘오라이’라고 발음했으니 오죽했겠는가. 하지만 내가 부딪혀야 할 현실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최종 목적지까지 실수 없이 가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인지 극도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눈은 말똥말똥하고 정신도 또렷해졌다.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그렇게 맛있던 기내식도 모래알을 씹는 듯했다.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후 비행기는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에 착륙했다. 이제까지 거쳐 온 다른 공항들에 비해 스히폴 공항은 규모에서부터 나를 압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에서는 런던 히드로 공항,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 프랑스의 샤를드골 공항에 이어 4번째로 큰 공항이었다. 취항항공사만 무려 90개사에 달하며, 계류장에는 항공기 144대가 동시에 머무를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컸다. 거대한 우주에 버려진 우주미아처럼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앞섰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질 정도였다. 그곳에서부터 묻고 물어 에스컬레이터를 30분이나 타야 하는 거대한 공항에서 나는 겨우 파리행 경비행기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일종의 모험이었던 길 찾기가 끝나자 유럽, 미주, 아프리카, 아시아로 갈라지는 수십 개의 노선들이 보였다. 함께 탑승한 이방인들은 어리벙벙하게 서 있는 나를 무슨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이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하긴 노란 피부에 코도 납작하고 땅땅한 놈이 어슬렁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동양인 비슷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위안이 될 텐데 온통 코쟁이들만 보이자 나는 당황해서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비행기에 올라 땀을 훔치며 둘러보니 20여 명이 탈 정도의 아담한 실내가 시골 시내버스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이윽고 비행기는 파리를 향해 출발했고, 그제야 나는 마음이 놓였다. 공항에만 도착하면 스메트주식회사에서 마스 박사가 마중을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비행기는 한 시간 쯤 유럽 상공을 날아 드디어 파리에 도착했다. 나는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휴우!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었다. 다행히 입국절차는 간소해서 체크하는 사람이 없었고 스탬프도 찍어주지 않았다. 짐을 챙겨서 출구로 나오자 마스 박사가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반가움에 그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마스 박사와 함께 공항에 세워둔 벤츠를 타고 벨기에 데셀에 있는 스메트주식회사로 달려갔다. 초겨울인데도 들판에서는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평야가 얼마나 넓은지 가도 가도 산은 없고 온통 푸른 초원뿐이었다. 오는 동안의 긴장까지 풀어지게 만드는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2시간을 달린 끝에 드디어 스메트 본사에 도착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하나같이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직원들로부터 정중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회의실로 가서 회사의 포트폴리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우선 프레젠테이션 진행자는 스메트주식회사가 현재 100년의 전통을 이어오는 자랑스러운 회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면서 그간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영상으로 일일이 공사현장을 보여주었다. 마치 스펙터클한 영화를 보듯 웅장하게 만들어진 영상물을 보자 은근히 기가 죽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어느 대기업에서도 그토록 멋진 회사 홍보자료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일에 철저한 그들이 부러웠다.회사에 대한 소개를 듣고 나서 간단한 다과와 차를 마신 후 네덜란드 쪽으로 달려 숙소가 있는 앤트워프에 도착했다. 앤트워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화 『플란다스의 개』의 무대가 되었던 플랑드르 지방으로, 수도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착한 소년 네로와 늙은 충견 파트라슈가 우유배달 하던 모습, 마음씨 착한 다스 할아버지가 죽고 난 후 마을에서 쫓겨난 네로와 파트라슈가 콩쿠르에 출품한 작품이 낙선하자 절망하는 모습, 루벤스가 그린 예수성화 아래서 파트라슈를 껴안고 얼어 죽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나는 시내를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그리스트 호텔에서 여독을 푼 뒤, 스메트에서 안내하는 교외의 한적한 곳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은 아름드리나무로 지어져 100년은 족히 되었을 것 같은 마구간을 식당으로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나무들은 군데군데 좀벌레가 파먹은 흔적이 있었지만 그 자리를 파내고 일일이 니스를 칠해서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식당 내부에 흩어져 있는 그릇들도 모두 골동품이었고, 사방에 빼곡하게 세워둔 포도주병마다 식당에서 생산하는 와인이 담겨 있다고 했다. 우리가 주문한 요리는 송아지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였다. 한 입 베어서 먹어보니 육질이 아주 연하고 맛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고기가 맛있습니까?”“이곳에서는 매일 소비량에 맞춰서 당일로 송아지를 잡아 요리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며칠 전에 예약을 해야만 합니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입니다.”신선한 재료와 정성이 그들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주위에는 수령이 수백 년은 넘을 듯한 아름드리 도토리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수북하게 떨어진 낙엽에 섞여 도토리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그곳에서는 물자가 풍부해서인지 도토리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묵을 만들면 수백 명이 먹고도 남을 양이라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곳의 도토리는 우리나라 것보다 커서 마치 커다란 알밤 같았다. 나는 어렸을 때 예쁜 도토리로 마부리(구슬치기)하던 생각이 떠올라 탐스러운 도토리 몇 알을 주워서 기념으로 주머니에 넣었다.​○ 11월 21일(월) : 고대와 신기술의 접목, 앤트워프 중앙역​꿀맛 같은 단잠이 들었는가 했는데 이른 새벽잠을 깼다. 먼 이국땅에서의 첫날밤이라 그랬는지 통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챙겨 입고 1층에 있는 뷔페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레스토랑에는 한국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어려워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음식을 담아 자리에 앉았다. 요리들은 하나같이 맛있었다. 벨기에 음식은 프랑스 요리와 더불어 고급 요리로 인정받는다. 그 중에서도 홍합을 삶은 ‘물르’라는 해물 요리가 일품이며, 노루나 꿩 등 사냥해서 잡은 짐승을 특별 요리한 ‘지비에’ 역시 특산 요리로 손꼽힌다. 또한, 어디를 가더라도 감자튀김인 ‘플리츠’를 파는 노점이 많은데, 우리가 패스트 푸드점에서 먹는 프렌치프라이의 원산지가 바로 벨기에다. 그래서 벨기에 요리에서 감자튀김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약방의 감초와도 같으며, 그밖에 빵과 베이컨, 햄, 치즈, 고기들까지 아주 맛있었다. 행복한 식사를 하고 나서 마스 박사와의 미팅약속이 잡혀 있는 커피숍으로 나갔다. 마스 박사는 이미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현장소장인 볼스 풀스도 함께였다. 키는 작달막했지만 까만 턱수염이 멋지고 개성 있게 생긴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는 턱수염을 기르면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는 서부영화에 나오는 배우처럼 멋있어 보였다. 나는 그들과 모닝커피를 한 잔 마신 뒤 중앙역 공사현장으로 이동했다. 현장사무실 근처 중앙역 앞에는 서울에는 없던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나는 신기해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볼스 풀스의 안내를 받아 현장을 돌아보았다. 돔(dome)의 높이가 109m인 중앙역의 천장은 너무 높아서 마치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높은 지붕이 기둥도 없이 하늘을 덮고 있는 엄청난 장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기둥둘레가 장정의 팔 길이로 족히 네 아름은 되어 보였다. 바로 그 아래를 우리가 도입하고자 하는 TRM공법(지하구조물 축조 공법으로서 지하에 거대한 ROOF 구조를 형성하는 공법)으로 공사를 시공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건물을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지하 역사를 조성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생각해 보았다. ‘건물 안으로 기찻길과 플랫폼을 만들다니… 우리는 지하철 1호선을 개통할 당시 이곳에 비하면 작은 규모의 동대문 아래쪽도 직선으로 뚫지 못해 비켜가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곳은 유럽이었다. 더구나 내가 서 있는 곳은 고딕 건축과 르네상스 미술을 자랑하는 역사적인 도시였다. 서민들의 주택부터 시청사에 이르기까지 고풍스러운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있는 데다, 벨기에에서 가장 높다는 123m의 첨탑을 자랑하는 노트르담 대성당, 네덜란드뿐 르네상스 양식의 걸작이라는 시청사와 길드하우스, 고성(古城)이었던 스텐성 일부를 개조한 해양박물관, 16∼17세기의 플랑드르파의 명화를 간직한 미술관, 루벤스의 주택을 복원한 루벤스하우스 등등… 아무리 둘러보아도 도시 전체가 유적지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 소중한 18세기 유적지를 조금도 다치지 않은 채 유적지 건물 아래 신기술을 채택하여 또 하나의 별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신공법 기술개발자보다도 이렇게 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훌륭하고 소신 있는 결단을 내려준 공무원이 더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관의 협조 하에 대규모 공사를 과감하게 주도해 나가고 있는 그곳이야말로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옆으로는 앤트워프 최고의 번화가인 메이르(Meir) 거리가 이어져 있었다. 도시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거리에는 쇼핑센터와 금융기관, 박물관, 극장, 성당, 유적지 등이 몰려 있었다. 나는 대형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당시 우리나라에도 미도파와 신세계 백화점 두 곳이 있었지만 규모와 질적인 면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쇼핑센터로 들어간 나는 신기한 물건들을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그만 출구를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밖으로 나오자 점심시간이었다. 우리는 마스 박사가 예약해 놓은 중국집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주인은 동양인인 나를 보고 아주 반가워했다. 나 역시 이유를 모른 채 반가워서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식사를 하면서 생각해 보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는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였다. 내가 벨기에를 방문하던 그해 5월에야 실질적인 한중 간 최초의 공식대면이 이루어졌으니, 두 나라는 적대적이면 적대적이었지 결코 가까운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도 나도 유럽에서는 동양의 이방인일 뿐이었다. 미스터 쟝으로 불리는 사장은 피부색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비스가 극진했다. 우리는 각자의 취향대로 음식을 주문했고, 나는 볶음밥을 먹었다. 그리고 쟝 사장은 덤이라면서 두부를 잘게 썰어 특별 요리를 해주기까지 했다. 매운 소스를 두부 위에 듬뿍 뿌리고 대충 버무렸더니 제법 입맛에 맞았다. 나중에야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게 퓨전으로 만든 마파두부였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땀까지 뻘뻘 흘리며 두 접시나 말끔히 비웠다. 마스 박사와 볼스 풀스 소장은 그런 나의 모습을 놀랍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콤한 동양음식을 먹고 나자 온몸에 생기가 돌았다.그리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견학한 뒤 호텔 12층에 마련된 회의실로 올라갔다. 흥미로운 그들의 기술을 듣는 시간이 이어졌다. 시차적응으로 피로할 법도 했지만 그들의 기술도 현장도 모든 것이 내게는 처음 온 여행지처럼, 신세계였다.​○ 11월 22일(화) : 전기를 소비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는 나라​ “Mr. 김, 잠은 잘 잤나요?”“해외출장이 처음이라서 푹 자지는 못했습니다.”“그랬군요, 오늘은 스메트 본사를 가보기로 합시다.”오늘도 현장견학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동해야 할 거리는 약 60km. 가는 길에는 앤트워프 근교의 한적한 교외 역에서 나 교수를 만나 함께 움직였다. 나 교수는 연구원으로 이곳에 와 있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30분 정도 달려 스메트 본사에 도착했다. 직원들과 스메트 사장의 환대 속에 간단한 다과시간을 가진 후 새로운 공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어 공사현장으로 가자 유압잭으로 흄관을 풋씽하는데 도로를 횡단하고 있었다. 작업복을 갈아입고 흄관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았더니 토질이 모래보다 고운 흙이었다. 나는 작업하는 전 과정을 직접 해보고 기계를 손수 작동해 보기도 하면서 그들의 노하우를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한 시간 가량 현장을 둘러본 후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갔다. 레스토랑은 네덜란드와 서독으로 가는 삼거리 갈림길에 위치해 있었다. 벨기에의 북부와 동부는 네덜란드와 독일, 남쪽은 룩셈부르크, 서쪽은 프랑스와 접해 있다. 특히 북쪽의 네덜란드와는 지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관계가 깊어서 두 나라를 저지국(The Low Countries)이라고 부른다.사실 대항해시대의 앤트워프는 당시로서는 최상의 항구였다. 훌륭한 부두와 내륙운하를 지니고 있는 데다 바닷물과 민물이 교호하는 북해 하구변의 스헬데 강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6세기 이래 암스테르담과 경쟁관계에 있는 다이아몬드 세공과 레이스 편물 공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앤트워프는 당시 급부상하고 있던 네덜란드에 의해 최후의 일격을 당하게 된다. 네덜란드가 스헬데 강을 봉쇄해 버린 것이다. 자신들 이외의 경쟁자를 용납할 수 없었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그 포문을 열었으며, 결국 1648년 뮌스터조약을 통해 앤트워프는 스헬데 강에서의 상업적 활동을 폐쇄하도록 강요받기에 이르렀다.그렇게 봉쇄당한 앤트워프의 선택은 대단히 절묘했다. 자신들의 주 무기인 직물산업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랜 전통을 현대의 패션산업으로 발전시켜 버린 것이다. 항구와 패션의 만남, 앤트워프는 그 묘한 대조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중이었다. 그 중심이 바로 내가 어제 보았던 메이르 거리, 일명 ‘패션과 보석의 거리’였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 벨기에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의 저력을 엿보는 듯했다.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그들은 나를 공장으로 안내해서 제일 먼저 창고를 보여주었다. 창고의 규모는 우리나라 어느 공구상가보다 큰 규모였고, 각종 공구들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 정돈되어 있었다. 작은 볼트 하나에서부터 대형 공구까지 비치되어 찾는 것도 쉬웠지만, 정확한 데이터에 의해 입출현황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컴퓨터에 모든 공구 현황을 빠짐없이 입력해서 어느 현장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 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공구 파악이 쉽다 보니 그만큼 일의 효율이 극대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장의 상황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네 마당보다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현장에는 토질에 관한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박물관이나 진시회장을 방불케 했다. 수많은 장비들이 현장으로 투입되기 위해 대기 상태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실드기계였다. 3m, 5m, 6m, 8m, 10m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줄지어 선 것만 해도 수없이 많았는데, 한 대의 가격만 해도 수십억을 호가하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곳에 있는 공구들의 가격은 한국의 경제사정으로는 도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액수였다. 나는 8m짜리 실드기계를 눈여겨보았다. 그 기계 한 대만 우리 회사에 있다면 터널공사를 휩쓸어 버릴 것 같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장비는 물론, 지하터널 공사의 공법이 전무해서 터널공사를 할 때마다 막대한 비용을 외국에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이윽고 해가 기울었다. 나는 다시 차를 타고 앤트워프로 돌아갔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평화로운 초원을 보고 있자니 가족들이 생각났다. 나 혼자서만 이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게 미안하고, 또 그리웠다. 언제나 가족을 소중하게 여겨왔지만 먼 곳에 오자 그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가족들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호텔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인데 집 생각을 해서 그런지 구수한 된장찌개 생각이 간절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결국 나는 어제 갔던 중국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메뉴판을 뒤적거려 봐도 아는 음식 이름이라고는 없었다. 한참 후에야 한문으로 콩두(荳) 자가 보였다. 고민할 것도 없이 그 음식을 시켰더니 쟝 사장이 서비스로 내왔던 마파두부였다. 볶음밥에 매운 소스를 비벼 아주 맛있게 먹었다.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시원했다. 호텔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워서 나는 영화관에 가보기로 했다.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유럽의 영화관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어느 뒷골목의 극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우리나라 영화관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규모로 큰 사랑방을 연상시켰다. 그곳에는 관객 십여 명이 차분하게 상영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는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 식곤증까지 겹치면서 그만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드르렁 드르렁, 코까지 골았다. 내 코고는 소리에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머쓱해진 나는 서둘러 극장을 나왔다. 극장 구경을 한 것으로 만족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입구에서부터 줄지어 선 나뭇가지들마다 예쁜 등을 치장해 놓은 게 보였다. 전구에서 새어나온 불빛은 안개 속에 스며들어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신비감을 주었다. 아무리 마음이 건조한 사람이라도 그 불빛 아래 서면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해 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로맨틱한 감성도 잠시, 워낙 절약정신이 몸에 밴 나에게는 모든 것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밤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대낮까지 불을 밝혀놓는 것은 영 못마땅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에서는 한 달에 일정량 이상 전기소비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벌금을 낸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지상의 천국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싶었다. 세상에 아끼지 않는다고 벌금을 내는 나라가 있다니….나는 뭐든지 아끼고 절약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1979년에 있었던 소위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극도의 시련기였다. 그에 따라 많은 기업들은 나날이 재무구조가 악화되었고, 휴업이나 부도의 악순환을 거듭했다. 당연히 국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허리띠를 조여 맬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83년부터 서서히 회복기미를 보이면서, 1986년에는 무역흑자 원년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국가적으로도 많은 노력이 뒤따랐지만, 근검절약하는 국민들의 저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황홀하게 반짝이는 불빛을 보면서 언젠가 우리나라도 세계경제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이 꼭 올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유럽의 낯선 땅에 서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11월 23일(수) : 벨기에의 다이아몬드 숙련공들​벨기에에 도착한 이래 아침식사는 늘 호텔에서 했고, 음식은 미식가의 나라라는 말이 어울리는 훌륭한 맛이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그토록 맛있던 음식들도 식상해지기 시작했다. 외국에 나가서 가장 힘든 것이 향수병과 음식문화라고는 하지만 나는 워낙 식성이 좋고 적응을 잘해서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보리밥과 된장국으로 단련된 몸이다 보니 예외일 수는 없었나 보다.외국으로 떠나오기 전, 경험 있는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귀띔을 해 주었더라면 고추장이나 장아찌 같은 밑반찬 몇 가지는 준비해 왔을 텐데…. 가지고 온 것이라고는 간단한 소지품과 옷가지가 전부였다. 무엇보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냐는 생각을 했던 게 화근이었다. 앞으로 몇 끼는 더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음식에 대한 고통을 어떻게 감수해야 할지 걱정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저녁을 많이 먹고 잠자리에 들어도 막상 잠을 청하려고 하면 속이 허전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서양음식은 끈기가 있는 우리의 토속음식과 달라서 배는 불러도 포만감이 없다. 그렇다고 마냥 맹물만 들이키자니 속이 메스꺼웠다. 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잼과 초콜릿, 과자, 빵, 치즈 같은 것들을 보고 있자니 아이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보리밥과 된장, 풋고추 생각이 더 간절했다.먹는 둥 마는 둥 아침식사가 끝날 무렵, 마스 박사와 볼스 풀스가 벤츠를 타고 왔다. 벤츠라면 우리나라에서는 갑부들이나 타는 차인데 이곳에서는 6백만 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다른 나라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나는 일단 대한항공사에 한국으로 돌아갈 티켓을 예약한 뒤 앤트워프의 중앙역 공사현장으로 이동했다. 어제에 이어 파이프 풋씽하는 기계를 눈여겨보면서 메모도 하고 기계를 작동시켜 보기도 했다. 볼스 풀스가 친절하게 기계작동법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며 다음번에는 더 상세하게 알려주겠노라고 했다. 그를 따라 게바르트 현장의 차수벽도 보았다. 이곳의 장비나 기술이 우리나라의 토질에도 가능할지는 미지수였으나, 차수가 확실하게 된다면 이 기술을 도입해 국내 지하토류벽 부분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현장을 둘러본 후 우리는 중앙역에서 나와 큰길을 건넜다. 왼쪽으로 걸어가자 다이아몬드 가게들이 쭉 들어서 있는 다이아몬드 거리가 나왔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한 다이아몬드 세공 공장으로 견학을 갔다. 세공 공장에서는 숙련공들이 오로지 손끝과 눈의 감각에 의존해 다이아몬드를 깎고 다듬고 광을 내고 있었다. 약간의 실수가 수백만 원 혹은 수억 원의 손실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늘 긴장 속에서 장인 정신을 발휘해야 하는 숙련공들은 낯선 방문객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 듯 작업에만 열중했다.벨기에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생산하지는 않지만 약 5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국가다. 앤트워프 시에만 약 1,600개의 다이아몬드 매매 업체가 있고, 현재 세계 다이아몬드의 약 60%가 이곳에서 거래되고 있다. 16세기 포르투갈 출신 유태인들이 이주해오면서 당시 유일한 생산지였던 인도의 다이아몬드가 이곳을 통해 유통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18세기 들어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이후부터는 전 세계 다이아몬드 중심지로 자리를 굳혔으며, 1893년에는 세계 최초로 다이아몬드 거래소도 설립되었다. 현재는 전 세계 25개 다이아몬드 거래소 가운데 앤트워프에만 4개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거래소의 창문이 모두 북쪽을 향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장 자연스런 채광 때문인데, 동향이나 남향, 서향 창문을 통해서는 일관된 자연채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나에게 갑자기 마스 박사가 목걸이 하나를 가리켰다. 다가가서 보니 빛을 받아 가지각색으로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엄청난 보석의 크기였다. 가격표를 보며 환산해 봤더니 어림잡아 한화 6천5백만 원 상당이었다. 세상에! 나를 혀를 내둘렀다. 태어나서 이렇게 값비싼 보석을 구경하는 것도 처음인 데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런 고가의 물건을 사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아내에게 이 목걸이를 선물한다면 놀라 기절하거나, 어디서 가짜를 들고 왔느냐며 믿지 못 할 게 분명했다.놀라는 나를 본 마스 박사가 벨기에의 민족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다이아몬드 세공이 활발한 데는 이곳 사람들의 개방성도 한 몫 한답니다. 앤트워프의 명칭만 해도 그래요. 영어로는 앤트워프, 프랑스어로는 앙베르, 네덜란드어로는 안트베르펜이 되는데, 여기 사람들은 이름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벨기에 명칭도 그렇죠. 벨지움, 벨지크, 벨히어 다 공용어로 사용됩니다. 다른 문화를 잘 받아들이는 편입니다.”비단 민족성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정학적 위치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되었다. 벨기에는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단일민족, 한민족을 강조하며 결코 개방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민족성을 소유했다. 하다못해 신기술 하나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현재까지도 ‘다문화’라는 말이 쓰고 있는 상황이니, 그 당시야 두말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정이 넘치는 사회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배타적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일본만 하더라도 외부에 대해 매우 폐쇄적인 사회지만, 문화면에서는 외부의 문화를 탐욕스러울 정도로 적극 받아들인다. 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제성장을 넘어, 기본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기에에서 신기술이 발달되어 있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안타깝게도 현재 벨기에의 다이아몬드 산업은 유럽경제가 악화되면서 뉴욕이나 인도, 이스라엘, 중국의 부상 등으로 예전만 못 하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는 3천명에 육박했던 앤트워프의 다이아몬드 세공 숙련공은 7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젊은 층이 힘든 세공 산업에 진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어느 나라나 쉽지 않은 포항출장샵 모양이었다.​○ 11월 24일(목) :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파리로 가다​오늘은 마스 박사와 파리에 가기로 되어 있다. 파리의 신시가지에 위치한 공사현장에서 시멘그라우트로 차수벽과 주위 건물에 지반 보강하는 것을 견학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간 모아놓은 비디오테이프와 기술자료, 카탈로그를 챙겨 로비로 내려왔다. 오늘은 특별히 마스 박사와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한 뒤 함께 움직였다.예정보다 일찍 호텔을 출발했다. 파리까지는 고속도로를 달려 4시 간 반쯤 소요되는 거리였다. 얼마 지나자 국경이 나타났다. 이렇게 자동차로 국경을 넘어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삼엄한 경비와 경직된 분위기가 제일 먼저 떠올랐으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생각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경비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을 뿐 신분증이나 여권을 확인하진 않았다. 입국 도장을 찍어주지도 않았다. 말이 국경이지 서울에서 전라도, 혹은 경상도까지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나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가? 아니,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건가?나는 의아해 하면서 국경을 지나고 나서도 삼십분 정도를 더 달렸다. 가는 동안 유럽의 고속도로는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건설 당시 아예 부지를 넓게 확보해 놓는다는데, 그렇게 확보한 땅의 좌우측은 도로로 사용하고 남아 있는 중앙의 부지는 녹지대로 만들어 중앙분리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다 차량이 늘어나면 안쪽으로 도로를 넓혀간다고 하니, 예산절감은 물론 도로확장 역시 언제든 계획을 세우면 쉽게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고속도를 만들어 놓은 뒤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1차선씩 넓혀 확장한다. 당연히 부지확보를 위해 예산이 추가될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혈세낭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 시가지는 18세기에 도시계획을 세워 건설했는데, 현대의 도시계획에 비해 훨씬 과학적인 데다 모든 도로가 방사선으로 설계되어 멋스러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특히 하수도 기술은 현대의 기술에 전혀 뒤지지 않을뿐더러 어떤 부분에서는 현대에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과학적이라고 한다. 우리는 파리의 구 시가지를 지나 신도시가 형성되는 시가지로 향했다. 많은 건물과 시설물을 건설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 지하 터파기를 하기 전에 주위 건물을 보강하기 위한 차수벽 형성 현장으로 향했다. 시멘트 풀을 지중에 넣어 흙과 교반해 파일을 만들고 차수벽체를 형성한다고 했다. 모래도 아니고 흙에 시멘트 풀을 넣어 벽체를 조성한다는 게 얼핏 이해되지 않았다. 또한 국내에서는 본 적조차 없는 생소한 대형 장비들이 수두룩했으며, 무엇보다 이런 대규모의 공사현장에 정작 일하는 사람이 몇 명 없다는 게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기계를 조작하는 기능공 몇이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현장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자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까지 불어 제법 차갑게 느껴졌다. 11월의 파리는 비가 오지 않더라도 대부분 날씨가 흐리다고 했다. 비단 파리만이 아니라 유럽은 위도 상으로 높고 흐리거나 비오는 날이 많아 일조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햇볕 쬐기를 즐기는 편이라고 한다. 노천카페나 야외에 사람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꽁꽁 언 몸을 녹일 겸 현장 근처의 호텔로 향했다. 그런데 호텔은 관광객들로 이미 만원 사례였다. 다른 호텔을 찾는 편이 나을 것 같아 호텔도 소개받고 저녁도 먹을 겸 교민회장이 운영한다는 오아시스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는 교민 몇이 둘러앉아 된장찌개며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다. 아, 익숙하고 그리운 냄새…. 냄새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그래도 초면에 인사는 해야겠기에 교민회장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불고기와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순식간에 밥 두 공기를 해치웠다. 오랜만에 한국음식이 들어가자 긴장과 피로가 풀리면서 그제야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촌놈은 역시 된장이 최곱니다.”“맞아요, 맞아!”식당에서 밥을 먹던 교민들이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된장이란 한 피(?)를 나눈 형제로 금방 가까워져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참 후 식당 밖으로 나오자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인회장의 소개를 받아 오아시스 부근의 샴프라인 호텔로 이동했다.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한 뒤 마스 박사의 손을 굳게 잡았다. “닥터 마스, 우리 조만간에 꼭 다시 만납시다.”“저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아쉬운 작별이었다. 마스 박사와 헤어지고 나는 2층 룸으로 올라갔다. 대리석 계단과 오래된 문짝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런데 침대에 눕자 스프링이 망가졌는지 심하게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고, 창문마저 비바람에 덜컹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샴프라인 호텔은 아주 오래된 호텔로, 옛날에는 프랑스 귀족들이 묵었던 곳이라고 한다. 분명 당시에는 최고급 호텔이었을 텐데 많이 쇠락해 있었다. 파리시에서 옛 건물들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 증축하거나 개축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놓았기 때문이다. 문을 비롯해 내부의 어떤 것이든 바꿀 수가 없고 수리조차 규제되고 있다. 옛 것을 지키고자 하는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현재의 파리는 그냥 얻어진 게 아닌 것이다. 나는 갑자기 호텔 방안에 있다는 게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갔다.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센 강변을 따라 수많은 다리들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은 어릴 적 그림엽서에서 튀어나온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사실 파리는 세계의 다른 나라 수도와 비교하면 몹시 좁은 편에 속한다. 그런데 이 작은 도시에 어떤 힘이 있기에 세계 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일까? ‘거리의 모퉁이 하나를 돌고, 다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바로 그곳에 역사가 전개’된다고 했던 괴테의 말을 떠올리며 골목골목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역사적 유적의 무한한 보고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현대에 살고 현대에서 활동하는 도시였다. 특히 이곳은 패션의 도시가 아니던가? 루이뷔통, 크리스찬 디올, 코코 샤넬, 이브생 로랑, 피에르 가르뎅…. 모두 프랑스의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들이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라면 누구나 파리에서 공부하기를 원하고, 모델들은 프랑스 파리의 패션쇼 무대에 서는 것이 소망이다. 그만큼 파리는 과거와 현대가 잘 어우러진 도시였다.그런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나란히 이웃한 현대적인 건물과 오래된 건물이었다. 또한, 오래된 건물의 1층을 카페나 상점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흔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번화한 도시에서 이런 유적들을 만난 기억이 없는 데다, 명승지라고 이름 붙은 것들은 대부분 지방에 있으며 지방에서도 외떨어지고 한갓진 곳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매일같이 출근하는 길에 수백 년 된 유적지를 바라보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고이 모셔진 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유적지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어디를 가볼까, 한참 고심하던 끝에 나는 오페라극장부터 구경해 보자는 생각으로 택시를 탔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아름다운 거리와 조각들, 모든 것이 예술품이었다. 벨기에보다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럽고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오페라극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안타깝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개관시간이 오전 10시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걷다가 극장이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극장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영화는 프랑스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영상만으로도 대충 줄거리가 이해되었다. 오히려 마음대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어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 사이, 시가지는 은은하게 불을 밝히고 저녁이 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오아시스 식당으로 방향을 잡았다. 식당에 도착하자 많은 교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분위기가 떠들썩했다. “김 선생님, 잘 오셨습니다. 식사하시려고요?”“예, 된장찌개 생각이 나서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다름이 아니라 파리로 유학 온 학생이 있는데, 그 학생이 오늘 음악 발표회를 합니다.”“아, 그렇습니까?”그런데 한인회장은 뜻밖에 초대장을 몇 장 건네주며 꼭 참석해달라는 신신당부까지 했다. 나는 얼떨결에 참석하겠노라 대답을 한 뒤 저녁을 배부르게 먹었다. 먹고 나자 몸이 나른해져서 일단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대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인회장이 호텔로 차를 보내왔다. 하는 수 없이 정장으로 갈아입은 뒤 독창회가 열린다는 학교로 갔다.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독창회가 시작되어, 찬란한 조명 아래 화려한 의상을 입은 학생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관객보다 촬영기사와 조명사, 사진기사, 그리고 진행을 돕는 연출자가 더 많아 보였다. 게다가 교민뿐인 관객들도 마지못해 온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나도 하루 종일 걸어 다녀서 피곤한 데다 성악에는 취미가 없던 터라 몇 곡 듣고 있다 보니 스르르 졸음이 밀려왔다. 그 상태로 더 이상 앉아 있으면 괜히 주최 측에 피해만 줄 것 같아서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 나왔다.​○ 11월 25일(금) :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아침 일찍 서둘러 오아시스로 향했다. 그런데 식당 문이 닫혀 있었다.파리는 아침시간, 점심시간, 저녁시간, 하루 세 번 파트타임으로 한 두 시간 영업을 한다. 점심타임과 저녁타임을 지켜서 영업을 하다 보니 서비스하는 사람들도 낮 시간 근무자와 저녁시간 근무자가 다르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우리나라는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영업을 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운데 파리에서는 근무시간에 맞춰 출근했다 고작 한 두 시간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집에서 쉬거나 여가를 즐긴다고 한다. 그들의 일상이 부럽고, 그렇게 여유롭게 일을 하는데도 이 정도로 잘 산다고 생각하자 약간 씁쓸했다. 하는 수 없이 문 닫은 식당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딱히 갈 곳이 없어 무작정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그러다 오페라극장으로 가는 버스를 발견하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우리나라의 고속버스보다 크고 멋있고 내부의 시설도 훌륭했다. 승객 몇몇이 신문을 보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 버스는 한가했다. 지금이 출근시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역시 부러운 모습이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만원버스에 시달려야 하는 교통지옥도 이곳에서는 먼 이야기처럼 보였다.이윽고 버스는 오페라 역에 멈췄다. 아! 감탄이 쏟아져 나오며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오페라극장은 웅장함과 아름다움으로 나를 압도했다. 사람들을 지나쳐 입구 쪽으로 가보았다. 입구에는 유리벽이 있고 그 속에 오페라를 공연했던 세트장을 축소해 재현해 놓은 게 보였다.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입구에 세워진 밀랍인형은 산 사람과 너무나 흡사해서 만져보기까지 했다. 한쪽에서는 공연할 극을 연습하느라 한창이었는데, 어림잡아 수백 명의 등장인물에 의상 또한 프랑스 궁중의상을 보는 듯했다. 게다가 좌석 수는 2,200여개, 무대에 한꺼번에 오를 수 있는 인원은 무려 450여명이라고 하니 규모 면에서도 단연 세계 최고였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과 더불어 세계3대 오페라극장으로 손꼽힌다고 한다.정면에는 바흐와 하이드 등 11명의 음악가들의 두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로비에는 헨델과 글루크 등의 좌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특히 천장에 늘어뜨린 약 6톤의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천장에는 샤갈의 유일한 천장화라는 프레스코화 ;이 그려져 있어 굳이 공연을 관람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한 볼거리였다. 간간이 조각상 앞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 젊은 화가들의 모습을 보자 여기가 예술가들의 나라라는 게 실감이 났다.그런데 오페라 관람은 입장료가 생각보다 비쌌다.“들어가 봐야 프랑스 말인데 알아듣겠어요?”그것도 그랬다. 우리는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극장에서 이어지는 오페라 광장을 지나 파리의 중심가인 리볼리 가에 위치한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으로 이동했다. 박물관은 루브르궁 내부에 있었다. 궁은 12세기 후반 필립 2세의 명으로 착공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궁이 아닌 요새였다고 한다. 이 요새가 루브르궁이 되기까지 수차례에 걸친 건물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고, 1672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쓰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광장에는 비둘기들이 평화롭게 날아다니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선 박물관은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규모가 얼마나 큰지 어디가 입구이고 어디가 출구인지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동서로 약 1km, 남북으로 약 30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는 물론, 소장품의 숫자만 약 30만 점이라고 했다. 우리가 갔을 때 박물관 앞에는 훗날 루브르의 상징이 된 유리 피라미드 공사가 한창이었다. 미술관다운 건물을 만들기 위해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이 루브르박물관 대개조 계획인 ‘그랑 루브르’를 세웠고, 이에 따라 1989년에 유리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나는 박물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부터 촬영한 뒤 호흡을 가다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접해보지 못한 과거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눈앞에 펼쳐졌다. 이집트 유물 전시관 입구의 커다란 스핑크스를 비롯해, 내부에는 20여개의 방들에 전시품이 소장되어 있었다. 각종 미술품과 파피루스 두루마리, 미이라, 도구들, 옷가지, 보석, 악기 그리고 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또한, 약 6,000점 이상의 그림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방대한 규모였다. 밀레, 다비드,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대가들의 그림은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도 교과서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그 느낌이 달랐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화면 밖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고개를 들자 천장과 벽면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그림들이 꽉 채워져 있었다. 어떤 그림은 한 폭이 건물 벽을 꽉 채우기도 했고, 하나같이 너무나 생생해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런 그림을 그렸다는 것도 대단했고, 지금껏 잘 보존해 오고 있다는 것도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었다. 고작 한 시간에 불과했지만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기분이었다. ‘3일을 보면 전부를 볼 수 있고 3개월을 보면 전부를 다 볼 수 없다’더니 정말 그랬다. 나는 아쉬움을 남겨둔 채 언젠가 꼭 다시 찾아와서 찬찬히 둘러보기로 하고 박물관을 나왔다.멀리 에펠탑이 보였다. 우리는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에펠탑 앞에 서자 높은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철로 만든 탑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에펠탑(Eiffel Tower)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돌 기념 ‘파리 만국박람회(EXPO)’ 때 세워진 높이 약 320m의 격자형 철탑이다. 이 탑을 세운 프랑스 건축가인 에펠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그는 뉴욕 ‘자유의 여신상’의 골격을 설계한 사람이었다.처음 에펠탑이 세워질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여태까지 한 번도 지어진 적이 없는 모양에다, 이집트의 가장 큰 피라미드보다 2배나 높은 검은 철물이 세워진다는 데 반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펠은 적은 노동력과 싼 비용으로 25개월 만에 이 탑을 세워버렸다. 철근 7천 톤에 250만 개의 볼트와 너트. 에펠탑은 한발 앞서 철로 대표되는 산업사회가 찾아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디자인이었던 셈이다. 완공 당시에도 파리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소설가 모파상을 비롯해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의 비판을 받았다. 오죽 했으면 모파상은 매일 에펠탑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장소는 에펠탑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을 올라갔다. 탑에는 저층부, 중층부, 상층부 3개소에 각각 전망 테라스가 있는데 각 전망대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전망대에 서자 파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탁 트였다. 구름이 뭉게뭉게 떠다니는 파란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궁전과 센 강이 발아래 있었다. 아름다운 센 강의 다리들과 도시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 강변을 따라 여유롭게 걷고 있는 청춘남녀들의 모습이 보이고 모든 것이 시간이 정지한 듯 평화로웠다.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져 왔다. 나는 파리 시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뒤 에펠탑을 내려왔다. 강변을 따라 걸었다. 파리 대부분의 역사적인 건축물과 유적은 센 강을 따라 주변에 위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센 강은 파리의 아름다움이 시작되는 강인 것이다. 나는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갔다. 유람선에 오르자 시원한 강바람이 얼굴에 스쳤다. 30개의 다리들 아래로 지나가며 안내자로부터 각각에 얽힌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다리들은 흔적도 모습도 제각각 달랐으며, 개성과 사연 역시 달랐다. “비라켕 다리는 보시는 것처럼 2층으로는 메트로가 지나가며 1층으로는 사람들과 자동차가 오가는 복합적인 구조입니다. 영화 ;에서 주인공들이 처음 만난 첫 장면을 찍은 곳입니다. 영화 속 연인들의 비운의 사랑과 이별이 다리에서 느껴지는 것 같죠? 그리고 에펠탑 앞의 웅장한 저 다리는 이에나 다리입니다. 1806년 프러시안과의 전쟁에 승리하자 나폴레옹이 다리의 건설을 명령했으나 그의 실각과 함께 건축과 파괴의 지난한 세월을 거쳐야 했던 다리입니다. 그리고 저 다리가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라는 시구로 단번에 쎄느 강의 대표적인 다리로 급부상한 미라보 다리입니다.”그밖에도 퐁데자르 다리에는 예술의 다리라는 별칭답게 화가와 음악가들의 모습이 보이고, 병에 담긴 와인을 기울이는 사람들도 보였다. 오랫동안 파리 예술가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카뮈, 사르트르, 랭보 등이 즐겨 찾던 곳이라고 한다. 그들은 다리 위에서 숱한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400년 역사를 지닌 퐁네프 다리도 보였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내 마음 속에 깊이 아로 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옴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사랑은 흘러간다 이 물결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어쩌면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한가 희망이란 왜 이렇게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센 강의 물결은 고요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읊조리고 있노라니, 그동안의 시간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힘든 일도 있었고 기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괴로움 뒤에는 항상 기쁨이 찾아왔고, 그 기쁨이 영원한 것도 아니었다. 모두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괴롭다고 울상을 지을 일도 아니며, 기쁘다고 자만하거나 우쭐할 일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시기를 넘어서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강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유람선에서 내리자 궂은 날씨에 비까지 내렸다. 한겨울에 내리는 비는 눈보다 더욱 살갗을 파고들었다. 걷기에는 무리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